#.한글로 쓴 다른 문자도 아름답다는 것, 아시나요?

한글 폰트는 한글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하나의 폰트는 수천에서 수만 자의 낱글자로 구성된다. 이 낱글자들 중에 로마자가 들어 있지 않다면 한영 변환 키를 눌러도 영문이나 알파벳을 입력할 수 없다. 한글 폰트 안에는 한글을 중심으로 숫자, 문장부호, 로마자가 기본적으로 들어 있고 나아가 한자, 가나 문자, 그리스 문자, 키릴 문자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한글 폰트와 다른 문자의 폰트가 디자인적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노을은 필기도구로 한글과 로마자를 잇는다. 한글 글씨체를 형성한 도구가 둥근 붓이라면, 로마자 글씨체를 형성한 가장 중요한 도구는 납작펜이다. 이 납작펜으로 한글을 쓰면 어떤 모양일까? 이노을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만 적당히 어울리도록 한 것이 아니라, 글자의 유전인자인 필기도구부터 한글과 로마자를 본격적으로 일치시켜보고자 했다. 로마자의 필기구가 한글에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인상을 주도록, 납작펜의 기하학적 속성을 공유하는 스카펠 나이프 등 여러 도구를 탐구했다. 〈그림 1〉의 위에서 두 번째 나이프처럼 알루미늄 종이로 필기구를 직접 제작해보기도 했다.
이런 탐구 끝에 만들어진 한글 폰트 ‘아르바나’는 독특한 개성을 가지면서도 가독성이 높다. 제목뿐 아니라 긴 글을 담은 한글 본문 지면에서도 색다른 색채감으로 읽는 맛을 준다. 역방향, 즉 한글의 붓을 필기도구로 한 로마자 디자인도 고려하고 있다.
함민주의 ‘블레이즈페이스 한글’은 제임스 에드먼슨의 로마자 폰트 ‘오노 블레이즈페이스 이탤릭(Ohno Blazeface Italic)’에서 영감을 얻었다. 독창성이란 없던 것에서만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영감에 반응해 응용하는 방식에서도 발산되는 덕목이다. 함민주는 로마자 폰트가 가진 스타일을 단순히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남다른 독창성을 보여주며 한글 디자인이 아직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그 길은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생기와 활력으로 가득한 눈부신 길이다. 구체적으로, 〈그림 2〉의 ‘핫’에서 ㅅ 받침과 ㅏ가 만나는 속 공간을 처리하는 등의 디자인 능력은 탁월하다. 그의 또 다른 폰트인 ‘둥켈산스’는 국제 폰트 디자인 공모전인 그란샨(Granschan) 대회에서 한글 부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같은 대회에서 한글이 아닌 로마자-그리스 문자 부문에서 이 문자들의 네이티브인 서구권 톱 디자이너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한 한국인 여성 폰트 디자이너도 있다. 류양희의 ‘윌로우’는 한글과 로마자, 그리스 문자가 처음부터 대등한 조화를 이루도록 기획한 폰트 프로젝트다. 한글 디자인은 이렇게 국내의 한국어 사용자 시장을 훌쩍 넘어서서 가고 있다.
한글과 로마자, 그리고 한자
위예진은 폰트 회사 산돌에 있을 때, ‘그레타산스’의 한글 및 IBM 전용서체 ‘IBM Plex Sans’의 일본 문자·중국 번체 등 국제적인 대규모 프로젝트 제작을 리드했다. 그는 한글과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 속한 다른 문자들 간의 디자인 조화를 해결하는 일에 고민이 깊다.

한글은 한자와 마찬가지로 낱글자들이 네모난 틀 가운데 들어가지만, 초성·중성·종성이 음절로 모이기에 어떻게 모아쓰느냐에 따라 탈네모적 성격을 갖기도 한다. 〈그림 3〉의 오른쪽처럼 탈네모적 모듈을 가진 한글 폰트는 받침(종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아랫부분의 리듬감이 강하게 출렁인다. 이때는 글줄의 시각 중심이 네모틀의 중간보다 한참 위에 놓이게 된다. 한자나 일본 문자는 이런 ‘시각 중심선’의 위치 문제를 한글처럼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주변 문자들에도 한글 디자인의 고유한 개념을 적용해야 할까? 이런 고민들을 교류하는 과정에서 한글의 속성은 다른 문자에 새로운 디자인의 영감을 주기도 할 것이다.
한편 수천 자에서 수만 자를 모두 만들지 않아도, 한 단어 정도로만 글자 디자인을 강렬하게 완성하는 영역이 있다. ‘레터링’이라고 한다. 자유도와 표현력이 높은 레터링 영역에서는 한글과 다른 문자가 기발한 형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림 4〉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김현진의 ‘장난/Joke’는 ‘장난’이면서 동시에 ‘Joke’로 읽힌다. ‘퀸’은 영문 Queen에서 Q 꼬리의 화려함을 한글로 기세 좋게 받아냈다. ‘스타워즈’는 팬심으로, ‘오비완-케노비’는 디즈니의 새로운 시리즈물을 기대하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원작 타이틀의 특성을 살려 만들었다. 뒤의 둘은 공식 커미션 작업은 아니지만,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이 다각화하는 시대에 어울릴 영화·시리즈물 타이틀 레터링은 어떤 양상일지 디자이너가 앞서 펼쳐 보이는 제안이다.
이제 한글은 순수주의의 무균실에 갇혀 다른 문자와의 접촉이 차단되어야 할 만큼 병약하지 않다. 세계의 문자 생태에서 로마자의 우점과 독식은 우려되지만, 한글은 디자인으로 단단하고도 유연하게 대응해가고 있다. 나아가 한글은 다른 문자들을 환대하는 넉넉한 도량을 가진 문자로 거듭나는 중이다. 이 일렁일렁한 흐름을 주도하는 젊은 여성 폰트 디자이너들이,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유지원 (타이포그래퍼·글문화연구소 소장) editor@sisain.co.kr